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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4일(월)

[인터뷰] ‘리더들의 멘토’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송상현 회장

2019-10-1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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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원 기자] 유니세프는 유엔 산하 기구로 70년 이상의 경험과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어린이 구호 전문기관이다. 국제 구호 기관 중 가장 많은 약 190개 나라와 영토에서 활동하며 전 세계 어디서나 재난 현장에 가장 신속하게 접근한다. 더불어 긴급상황 종료 후에도 한결같이 어린이들의 장기적인 발전을 지원한다.

송상현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이하 송상현 회장)은 이런 유니세프에 27년간 몸담아온 자타공인 ‘유니세프 맨’이다. 6.25 전쟁 당시 유니세프의 구호 활동으로 처음 인연을 맺은 이후 서울대학교 교수와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을 거치면서도 그가 받았던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다른 어린이들을 위해 되돌려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명망 높은 법조인이자 교육자로서 ‘리더들의 리더’라는 더없이 명예로운 평가를 받는 송상현 회장. 그를 존경하는 제자들은 이 잊지 못할 스승의 귀국을 기념하기 위해 2015년 ‘내 마음의 영원한 등대’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갖은 악조건들 속에서도 시대의 등불로 사회의 각 곳의 어두움을 묵묵히 밝혀온 그. 짧게 그의 삶을 재조명하며 다시금 봉사하는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봤다.

Q. 유니세프는 국적이나 이념, 종교 등의 차별 없이 어린이를 구호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 연합(UN)의 상설 보조 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유니세프한국위원회에서 최근 특별히 주력하고 있는 사업이 있나

“올해는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채택한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유니세프는 2030년까지 지속가능발전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 ‘2018-2021 중점 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아동 권리 협약에 기반을 둔 이 계획은 생존과 발달, 교육, 보호, 안전과 위생 등 다양한 사업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 어느 것 하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아세아 지역은 교육열이 강한 지역인 만큼 교육에 좀 더 비중을 둬 ‘스쿨스 포 아시아(Schools for Asia)’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하고 있다. 2012년 박양숙 여사의 기부금 백억 원으로 시작된 이 아시아 어린이 교육사업은 아시아 11개국의 국가에 학교를 설립하거나 낙후된 학교 수리, 교과서 및 학용품 제공, 교육 과정 개발이나 교사 훈련과 같은 재정 지원부터 어린이들의 식수나 세면시설 등 위생 관리 역시 포함한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한국이 정치,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요소는 바로 교육이다. 유니세프한국위원회에서는 아시아 개발도상국도 한국과 같이 교육을 통해 어린이에게 기회를 주고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Schools for Asia’ 캠페인을 중점 사업으로 추진한다”

Q. 2019년 8월 유니세프 헨리에타 포어(Henrietta H. Fore) 총재가 방한해 “한국은 특별한 파트너다”라는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유니세프한국위원회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자부심이 클 것 같은데

“적절한 말씀이셨다(웃음). 유니세프는 70년 이상의 역사가 있는데 이중 우리 유니세프한국위원회는 3가지 정도의 세계적인 기록을 세웠다. 첫 번째로 유니세프 전체 회원국 190여 개중 선진국으로부터 원조를 받다가 이제는 다른 나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나라로 탈바꿈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두 번째로는 유니세프의 도움으로 어려운 시절을 극복한 뒤 94년 1월 1일부터 유니세프한국위원회가 결성되어 우리 스스로 모금을 하고, 우리 스스로 경영을 하기 시작한 지 20여 년이 지났는데 지금은 이런 노력 끝에 우리가 세계 모금 순위에서 미국, 일본 다음으로 3등을 차지하고 있다. 통계상으로야 3등이지만 나는 항상 그 통계를 반박하곤 한다. 삼억 오천만 미국 인구가 낸 금액과 우리나라 오천만 국민이 낸 금액을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좀 불공평하지 않나(웃음). 마지막으로 33개의 선진국형 국가 위원회 중에서도 한국위원회는 효율성이나 투명성 면에서나 가장 모범적이라고 평가 받는다. 유니세프는 190여개 회원국 중 한국을 포함해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33개국만이 그 지역에 국가 위원회를 두어 운영한다.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기준 한 가지는 경제 발전의 수준이고, 다른 한 가지는 민주주의의 성취도이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한국과 일본, 홍콩 이 세 지역에만 유일하게 선진국형 국가위원회가 설립됐다”

Q. 유니세프한국위원회는 유니세프 본부 송금액 세계 3위, 정기후원자 수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이런 자랑스러운 결과를 위해 어떤 노력이 있었나

“일단 기부를 하시는 분에게는 얼마를 기부하든 이 기부금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되고 있는지가 초미의 관심사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유니세프 한국위원회는 가장 효율적이고 투명한 단체다. 가장 효율적인 단체라는 것에는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가령 한 가지 기준을 얘기하자면 모금액 대비 활동비 지출액의 비율을 예로 들 수 있다. 유니세프한국위원회는 전 세계 선진국형 국가위원회 중에서 가장 높은 비율의 모금액을 본부에 송금한다. 가령 후원금이 100원이라면 그중 인건비 등의 활동비를 제외한 84.6원을 본부에 송금한다. 또한 투명성의 경우, 유니세프한국위원회는 정기적으로 웹사이트에 감사보고서, 수입지출 대조표 등을 공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후원기금사용처 공개를 통한 투명한 재정 운영은 평가 기관과 개인 후원자 모두에게 유니세프한국위원회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Q. 6.25 당시 겪은 경험으로 유니세프와 인연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당시의 기억을 조금 들려줄 수 있나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6.25가 발발해 갑작스레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됐다. 무수한 피난민들이 작은 지역에 모이다 보니 제대로 갖추어진 게 하나도 없었지만, 특히 교육 면에서 정말 열악한 환경이었다. 제대로 된 교실도, 전기도 없어 질퍽한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천막을 쳐 공부했다. 학용품은 더욱 심각했고 늘상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렇게 고군분투하던 어느 날 깨끗하고 질 좋은 학용품을 갑작스럽게 나누어 받고, 따뜻한 물에 탄 가루우유를 배식받았다. 알고 보니 전 세계가 우리에게 준 구호품을 실은 배가 부산항에 입항한 것이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전 세계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줬다는 기억,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나도 언젠가 커서 여유가 있으면 우리보다 못사는 다른 나라의 어린이들을 돕는 것이 당연한 의무가 되겠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막연하게나마 가졌던 것 같다. 아마 그것이 동기가 됐을 거다”

Q. 유니세프 이전에도 다양한 사회봉사 사업에 참여한 것으로 들었다

“유니세프에서 활동하던 때와 시기적으로 중복되기는 하는데, 이 전에는 ‘한국 백혈병 어린이 제단’이라는 것을 법인으로 만들어 약 10년 이상 이사장으로서 활동했다. 어린이들에게 잘 발생하는 소아암, 혈액암의 종류가 20~30가지 정도가 있는데, 그중 특히 잘 발생하는 것이 백혈병이라 대표 명사로 백혈병이라고 칭한다. 그런 질병으로 고생하는 아이들을 집중적으로 돕는 단체였고, 그 이전에는 보육원에서 18세가 되어 강제 퇴소를 당한 청소년들을 성인이 될 때까지 돌봐주는 기관에서 봉사하는 일을 했었다. 또 월남전 이후 파견된 군인들과 현지 여성 사이에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태어나고 방치되어 베트남에서는 크게 사회 문제가 됐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라이따이한이라고 하는데 내가 그 사정을 듣고 도우려 했을 때는 이미 그들이 다 자란 상태였다. 그래서 대신 베트남에 직업 훈련소를 만들어 자동차나 TV 수리 같은 기술을 가르쳐 사회로 돌려보내는 사업 등도 진행했다”

Q. 이렇게 사회봉사 활동에 주력하게 된 데에는 가족들의 영향도 있나

“나는 올해로 유니세프에 몸담은 지 27년이 되어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나는 유니세프 맨’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 아내는 60년간 적십자에서 봉사하신 장모님과 적십자 총재를 지내신 장인의 뒤를 이어 35년간 적십자에 몸담아온 ‘적십자인’이다(웃음). 또 생전 아버지께서도 기부를 자주 하셨는데, 절대 알려지지 않도록 주의하셨다. 내 아이들도 유니세프를 포함한 몇 가지 단체의 후원자이다”

Q. 35년 동안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했다. 권위 있는 법학자에서 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교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대학을 옥죄이고 억압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 많은 제자들이 퇴학을 당하고 심지어 옥살이도 했다. 인권이라는 것에 참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그 시절의 인권은 막강한 독재 권력 앞에서 저항하는 차원의 인권이었다. 이런 사회, 정치적 현실 앞에서 우리 교수가 절대 권력 앞에서는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느껴 가슴을 치고 한탄하기도 했다. 이런 사회 현상 속에서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 외국의 선례나 문화를 보며 연구하는 자세로 인권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됐다”

Q. 아시아인 최초로 국가 형사재판소(ICC) 소장을 거쳐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직을 맡았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서울대 정년 퇴임을 앞두고, 은퇴 후를 설계하던 중 국제 형사재판소가 창설되어 헤이그 주재 재판관으로의 선거 출마를 요청받았다. 최고 법원에 근무 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 요건과 영어 실력을 갖춘 적임자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연한 기회에 출마했다가 당선이 되어 헤이그에서 재판관으로, 후반 6년은 소장으로 당선돼 총 12년간 근무하게 됐다. 한국을 떠나 헤이그에서 근무하면서도 유니세프한국위원회와의 관계는 계속됐다. 내 전임 회장단이 임기가 되어 물러나시던 때 나는 아직 헤이그에 머무는 중이었는데 반강제로 회장으로 임명됐다"

Q. 국제형사재판소(ICC)라는 특수한 기관에서 근무했던 만큼, 잊지 못할 사건을 많이 목격했을 것 같다. 위험했던 순간은 없었나

“너무 많다. 하루하루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다. 다들 특혜를 누리다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현실은 정 반대다. 내가 죽을 뻔한 고비가 3번 정도 있었는데, 헬리콥터가 추락하기도 하고 밀림 속에서 반군들이 포위해 무차별 폭격을 당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경호원 한 명은 사망하고, 한 명은 아직도 입원 중이다. 또 아프리카 오지를 방문하며 생각지도 못했던 악조건 등이 발생하기도 하고.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카다피 아들의 재판을 위해 우리 재판소에서 호주 여성을 포함한 4인으로 구성된 변호인단을 선임해 리비아로 보냈는데, 리비아 정부에서 부당하게 그 넷을 전부 감옥에 가두는 일이 발생했다. 그들을 석방하기 위해 한 달을 잠도 안 자고 죽기 살기로 협상을 했다. 결국 내가 직접 리비아로 가게 됐는데, 우리나라 신문에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이목을 끌었던 사건이라 이탈리아 대통령이 직접 자기 전용기를 내주기도 했다. 결국 전부 구출해서 헤이그로 태우고 돌아왔다. 목숨을 내걸고 한 일이라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리비아에 주재원으로 있던 미국 대사가 피살된 경우도 있었는데 나는 살아 돌아온 게 천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이 참 많았다”

Q.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2년을 보내고 ‘기사 대십자 훈장’을 받기도 하고, 외교부 장관에게서 귀화 요청을 받기도 했다는데

“임기가 만료될 무렵이 되니 네덜란드 왕이 송별 만찬을 해준다고 했는데, 감기에 걸려 부득이하게 외교부 장관이 대신 참석했다. 스무 명 남짓 참석했는데 식사 도중 갑자기 장관이 일어나더니 ‘왕이 당신에게 주는 네덜란드 최고의 훈장‘이라며 훈장을 수여 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거창하게 기록하지는 않는다. 집사람이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 유일한 증거물이다(웃음). 12년간 나를 면밀하게 관찰했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고 생각해서 주는 거라고 하셔서 기분 좋게 마지막 임기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훈장에 당황해 ‘고맙다, 한국에 가서 죽을 때까지 잘 보관하겠다‘고 답사를 했는데 그 말을 들은 외교부 장관이 ‘우리는 당신이 네덜란드에 살기를 희망한다’며 시민권을 신청해 주겠으니, 외무부의 상임 고문으로 계속 머물러 달라고 부탁했다. 다음날 사인만 하면 시민권이 발급되게끔 서류를 준비해 왔는데, 연금 관계 증명 서류를 핑계로 우회적으로 잘 거절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아무리 대우가 좋다 한들 내 나라에서 남은 생애를 보내는 편이 아무래도 낫지 않겠나(웃음)”

Q.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는 한국에서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질문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북한 인권 현인 그룹’으로 활동하셨다고 하시던데

“인권이라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부색, 종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려야 할 기본적인 존엄성의 문제다.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후 외국의 저명한 인사들과 협동해 2016년 ‘북한 인권 문제를 위한 현인 회의’를 조직했다. 나만 유일한 한국인이고 미국, 영국, 인도네시아 등 총 8인의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구성됐다.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나 매년 3월에 제네바에서 열리는 유엔 인권이사회 등에 참여해 북한 인권 문제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활동을 했었는데 현재는 활동이 중단된 상태다”


Q. 긴 시간 법대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법조인들을 길러냈다. 제자들이 ‘내 마음속의 영원한 등대’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는데, 법조인으로서 제자들에게 특별히 강조했던 부분이 있나

“다른 많은 선생님들이 다 그렇겠지만 나도 내가 가르친 학생들과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발전, 유지해오고 있다. 외국을 다니면서도 한국에서 내가 길러낸 제자들이 정부든 기업이든 다양한 곳으로 퍼져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 나에게 힘이 된다. 또 졸업생들의 단결된 힘이 내가 국제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도 큰 뒷받침이 된다. 그들에게도 늘 내 경험을 통해 새로운 국제 동향을 접하고, 좀 더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게 자극을 주는 역할을 하려 노력해오고 있다”

“연령에 관계없이 졸업생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게 참 즐겁다. ‘내 마음속의 영원한 등대’는 내가 국제형사재판소에서 퇴임해 귀국하는 기념으로 제자들이 우리가 사제 관계로 만나 생긴 에피소드를 한 줄씩 써서 정리해 문집으로 출간하게 됐다. 이걸 들은 국제형사재판소 시절 보좌관들 역시 자신들이 모신 상사에 관해 쓰고 싶다며 영어로 한 줄씩 덧붙이면서 이 계획에 참여해 더 고맙고 뜻 깊은 일이 됐다. 아무래도 인심을 안 잃고 임기를 잘 마친 것 같다(웃음)”

Q. 제자들 중 유명인들이 많다. ‘리더들의 멘토’라는 수식어가 특히 인상 깊은데, 이런 송상현 회장에게도 롤모델이 있나

“나는 경제적으로 굶주렸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꽤 어려운 삶을 살아왔다. 내가 5~6살 때지 일제 통치하에 있었다. 이런 왜정시대에 우리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감시와 탄압이 있었다. 해방 후에는 할아버지가 암살을 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고 6.25 전쟁 기간을 거치고 자랐는데 이런 트라우마가 오래도록 작용했다. 훌륭한 조상들의 명예에 먹칠하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 아래 칭찬보다는 늘 조심하며 자랐다. 바깥에서 좋은 롤모델을 찾는 경우도 많지만, 나는 먼저 집안에서 할아버지, 아버지, 장인 등 훌륭한 분들의 뒤를 따르려 노력한다. 결혼 한 후에는 생전 우리 장인이 아주 학식이 높고 그릇이 커 깊게 존경하는 마음을 돌아가실 때까지 가지고 살았다. 이제는 내가 집안의 어른이다 보니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다.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할 텐데 걱정도 되고(웃음)”

Q. 인생의 목표가 있다면?

“대단한 목표는 없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에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늘 사람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필요한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있으면 해가 되는 사람. 어느 곳에 몸을 담건 필요한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다. 누구든지 인생을 살며 가족, 친구가 됐든 조직이 됐든 필요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을 것이다. 누구든지 추구하는 가장 소박한 목표일 것이다”

Q. 유니세프한국위원회에서 일하길 희망하는 청년들이 많다. 유니세프한국위원회의 인재상은?

“’따뜻한 인류애’가 있어야 한다. ‘인류애’라는 표현이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람을 대할 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봉사하려는 정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재 유니세프한국위원회에 근무하는 직원들 역시 다른 조건들만 따진다면 더 큰 기업체 등에서도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들이다. 현실적인 조건보다 어린이들을 위한 복지나 생존, 발달을 위해 노력한다는 이상주의적인 생각으로 일하는 직원들이 많다”

Q. 현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을 위해 조언한다면

“많은 한국의 야심 있는 젊은이들이 국내에서의 발전에 만족하지 못하고 국제 진출을 꿈꾼다. 외국 진출을 하면 남들에게 더 인정받고, 일종의 특혜가 있다는 장밋빛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국제적으로 진출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의는 먼저 나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히겠다는 태도, 충실한 자기완성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는 국제 사회의 평화에 아주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초석이 되고 싶다는 그런 마음가짐과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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